에세이가 되고 싶은 잡담

일본어 왜 배우셨어요?

grtnomad 2022. 8. 14. 15:41

일본어를 제대로 익히기 시작한 것은, 보자보자...2005~6년이니까 헐...벌써 16년이 되었다. 오마이갓! (미쳤다, 나 언제 이렇게 나이 들었냐...) 일어로 큰 문제 없이 소통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특히 시험칠 일이 없어지고 나서는 일어공부를 따로 한 적은 없다. 일어를 한창 익힐 때도 일본 쇼프로와 드라마를 보고, 노래를 따라부르고, 친구를 사귀면서 공부라기 보다는 놀이처럼 익혔다.

그래서 몇개월 전 어떤 사람이 왜 일본어를 배웠냐고 물었을 땐 스스로도 순간적으로 '왜지? 왜였지?' 싶었다.ㅎㅎ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 나온 말은 "한일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하고 싶어서"였다.(겁나 거창함ㅎㅎㅎ) 그러자 그친구가 그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냐고 물었고 나는 "내 문제나 좀 해결했으면 좋겠다!"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오글거릴 정도지만, 당시 정부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풋내기는 아주 진심이었다. (사실 아직도 마음 한 켠에서 언젠가 간접적으로라도 그런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정부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이제 없지만, 길이 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고등학교 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분노하고 마음 아파했던 게 당시 진로를 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는데, 이후 일본어를 아주 잘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사실 일본과 한국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우선 일본의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대하 드라마 '신센구미(新選組)'를 보다가 얼어 붙은 일이 있었다. 개화기의 조선인들이 '이양선(異樣船)'을 타고 온 서양인들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것처럼 당시 일본인들도 '쿠로후네(黒船)'를 타고 온 서양인들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 포스터

 

드라마 '신센구미'는 단순히 재미있기도 했지만, 당시의 일본 역사를 현재의 일본이 어떻게 바라보는지 엿볼 수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그런데 극중 서양인이 일본인과 대화를 하며 "일본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서...(어쩌고 저쩌고)"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실제로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이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아니, 잠깐만, 일본, 일본이???' 이것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내 뇌 속에 들어온 적 없었던 개념이었다. 이후 일본 문화에 대해 더 알게 되고 보니 왜 일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얼어붙기 전까지 내가 접한 정보만을 조합하면 일본은 평화에서 가장 먼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든 생각은, '아,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그래서 한일 대화가 어렵고, 한일 문제가 더 풀리기 어려운 거구나! 스스로와 상대에 대한 인식부터 이렇게 다르니까......' 였다. 

 

다음으로는 한일문제를 다루는 한국의 언론 보도를 보고 다른 사람의 통번역이나 편집 없이 일본의 언론과 여론을 이해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보도와 일본의 보도 및 일본인 친구들의 반응을 비교해 봤을 때, 한국 언론이 일부의 일을 전체의 일인 것처럼 확대하거나 앞뒤 맥락을 자르고 전하는 일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역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기사도 꽤 봤다. 그렇게 하면 분노와 위기의식은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몰라도 문제의 해결은 더 어려워진다. 그 전까지는 외국어를 익히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던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재미있다는 점을 들었는데, 그 이후에는 다른이의 편집과 번역, 해석 없이 해당 언어권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고 싶다는 이유가 추가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어를 익히기 시작했고 지금은 딱히 쓸모가 없지만(ㅠㅋㅋ) 그래도 익히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조금 더 높은 해상도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기 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작게라도 어릴 적 소망을 이루는 날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만들 거다.